*글 : KBS 한국인의 밥상 참조.
*사진 : KBS 한국인의 밥상 출처.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 서울에는 모든 음식은 다 있습니다. 단 하나가 없는게 있습니다. 바로 서울 음식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장터에만 있던 음식, ‘설렁탕’입니다. 설렁탕의 국물은 뼈국물이 아니라 고깃국물입니다. 소의 여러부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위는 양지머리입니다. 설렁탕 국물은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 정도 끓여서 쌀뜨물색이 나와야합니다.
설렁탕의 유래설은 첫째, 임금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에서 끓였던 선농탕에서의 유래, 두 번째 몽골 음식 중 고기 삶은 국 ‘술루(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이는 음식)’ 유래입니다. 이 중 몽골에서 왔다는 유래가 더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서울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1930년대 축산자료를 보면 소 사육 마릿수가 나옵니다. 그 때 보면 150만 마리 한때는 180만 마리까지 늘어납니다. 일제강점기 축산정책 덕분에 서울 장터마다 설렁탕을 끓일 수 있었습니다.
옛날 장터에는 손님마다 고유의 뚝배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뚝배기가 많이 걸려있을수록 단골이 많다는 증거였다고 합니다.
서울은 무언가를 생산한다기 보다는 생산된 것이 집결하는 곳이였습니다.
서울은 국가가 도읍을 새로 정할 때 수도를 일컫는 말이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남쪽에는 정문 격인 숭례문이 있었습니다. 조선초기 마포나루에 물자들이 드나들던 곳이였습니다. 동쪽에 흥인지문에는 많이 농사를 짓던 곳과 채소밭과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서쪽 돈의문에는 군인들이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북쪽 숙정문이 있었습니다.
동대문에는 사대문 안에 똥, 거름을 다 모아서 똥차 열차에 실어서 그걸 성수동에 있는 벌판에 부으면 그걸로 거름을 줘서 채소를 재배하여 서울로 가져다 먹었다고합니다. 왕십리 일대에서 재배되었고 육의전에 모였습니다.
서울 사대문 안에는 그날그날의 물자들이 모였다가 판매가 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아침에 햇살을 받으며 동쪽을 바라보면서 오는 마포 어물상들은 항상 이마가 시커멓고 또 등 뒤로 햇살을 받고 오는 왕십리의 채소 장사꾼들은 목덜미가 다 시커멓습니다. 종로사거리에서 만나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일반 시민에게도 상업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는데 그 이후로 종로 4가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 이현시장이 발달했고 그 명맥을 이어 광장시장, 동대문 시장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큰 시장 중심지는 서소문 밖 서울역 쪽으로 이어지는 그 근처 일대에 시전에 준하는 내어물전 혹은 외어물전과 같은 큰 상권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 시장을 우리가 조선 후기에 칠패시장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내 식재료는 이현시장과 칠패시장에서 거의 다 공급을 했습니다.
서울은 밀가루보다는 녹두로 만든 빈대떡을 먹었다고합니다.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
해를 안보이게 해서 기른 것을 ‘움파’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움파를 움 속에다 넣어서 해를 못보게 해서 노르스름하고 속을 살찌우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 된 것도 움파라고 합니다. 정월에는 움파를 이용해서 떡국, 움파국 등을 끓였다고 합니다.
‘움파국’은 서울 토박이의 겨울 음식이였습니다. 움파를 썰고 밀가루를 뿌린 후 푼 달걀을 붓습니다. 고기는 잘게 다져서 양념을 한 뒤에 끓는 물에 넣습니다.(그래야 고기 빛깔이 벌겋지 않고 맑은 국물이 됨). 그리고 두부를 넣은 뒤에 움파를 계란에 버무려서 넣어 줍니다.
맑고 깨끗한 것이 서울 음식의 특징입니다.
‘어글탕’은 북어껍질에 밀가루를 뿌리고 양념한 고기를 펴 바릅니다. 그 후 밀가루를 위에 채를 이용하여 고루 뿌려줍니다. 그 후에 계란물에 묻혀 북어껍질 쪽 먼저 굽습니다. 그리고 맑은 장국에 북어체를 계란옷을 입혀 넣고 구운 북어껍질 전도 넣은 뒤에 파도 크게 썰어 넣고 끓입니다.
서울 음식은 잘게 다지고 고루 섞는 요리법이 유독 많은 서울음식입니다.
장에 조리기 전에 ‘섭산적’, 장에 조린 것을 ‘장산적’이라고 합니다.
서울은 큰 접시에다 많이 펼쳐서 놓는 야단스러운 음식이 아니고 그저 소박하게 진지를 중심으로 해서 차립니다. 국은 국이라고 안하고 메탕이라고 하고 진지와 함께 소박하게 잡수시도록 준비하는 밥상이라고 합니다.
식사 후에는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는데 숭늉에 밥알이 있는데 밥알은 건져먹으면 딸이 잘산다고 합니다.
말을 피해 다녔다는 말에서 유래된 ‘피맛골’입니다.
한강의 포구들은 서울로 물건들이 들어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중 마포나루가 제일 큰 집산지였습니다. 마포 쪽에는 나무 땔감이 많았어요. 그 땔감도 다 배로 실어오고 그랬습니다.
*최복순씨네
‘장김치’는 간장에 절인 김치입니다. 배추, 파, 미나리, 배, 무, 대추, 밤, 실고추 등을 썰고 설탕을 넣은 집간장에 버무려서 항아리에 넣어 이틀 보관하면 맛있다고 합니다. 주로 12월 초에 담가먹었다고 합니다.
‘소고기무국’은 끊는 물에 양지머리를 넣고 육수를 냅니다. 그리고 무를 나박하게 썰어넣고 고기가 익으면 꺼내고 파와 간장으로 간을 해서 끓입니다. 그리고 국을 푸고 잘게 찢어 양념한 고기를 올립니다. 지금은 생일 때 미역국을 먹지만 옛날에는 서울 어르신들 생신 때 뭇국을 드셨다고합니다.
‘염통구이’는 염통에 칼집을 내고 장으로 양념을 해서 숯불 위에서 구워 잣가루를 올립니다.
‘족편’은 우족과 고기를 삶아 아주 잘게 다지고 파, 마늘을 넣고 양념을 한 뒤에 우족 삶은 물에 넣습니다. 그리고 고명을 올리고 식히면 됩니다. 족편은 궁중음식이 민가에 내려온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서울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아서 도시인구가 급증하면서 음식문화가 변화했습니다. 서울토박이들은 개발논리에 의해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갔고 새로운 음식골목이 생겨났습니다. 서울 토박이 음식은 상업성이 있는 밥상이 아니였습니다.
족발거리, 떡볶이거리, 순대타운 다 이 때 생긴 것입니다.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알젓찌개’는 고기를 잘게 썰어 잘게 썰은 고추와 잘 볶은 뒤에 육수를 넣고 알젓(명란젓)을 넣고 두부를 잘게 주사위모양으로 썰어 넣고 끊입니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습니다. 그리고 새우젓으로 간을 냅니다.
서울토박이들은 된장찌개보다는 고추장찌개를 즐겨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란’도 잔치음식이였습니다. 국자에 계란을 깨서 넣고 끊는 물위에 들고 있습니다. 다 익으면 참깨를 뿌리고 참기름을 조금 넣습니다.
‘육개장’은 양지머리고기로 육수를 내고 고기를 잘게 찢어 고추가루 양념을 하고 고사리, 파를 넣고 계란 푼물을 넣고 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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